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츠 구데리안 (문단 편집) === 최초의 기갑부대, 최초의 작전 === 이러한 히틀러의 지원과 그의 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군인 집단은 구데리안을 철저하게 불신했다. 따라서 구데리안과 히틀러는 자신들이 준비한 신병기와 새로운 전쟁 전술이 유효하고 위력적이라는 사실을 [[증명]]해야만 했다. 그리고 그 기회가 찾아왔다. [[오스트리아 병합|오스트리아가 투표를 통해 독일과의 병합]]을 결정한 것이다.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 다지기 위해 위세를 보일 깜짝쇼가 필요 했고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독일군 장교들에게 1차대전때 보던 전차와 지금의 전차는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. 히틀러는 구데리안에게 그의 2기갑사단과 [[제1SS기갑사단|LSSAH]]를 이끌고 빈으로 입성하라고 명령한다. 구데리안은 제2 기갑사단을 독일 남부의 뷔르츠부르크에서 670 km, LSSAH 연대를 베를린에서 1000 km를 이끌고 48시간만에 주파하여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에 입성했다. 이 작전은 오늘날 보기엔 별거 아닌 그저 군대의 행군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전차들의 항속거리라고 해봐야 잘해봐야 50~200Km를 이동할 수 있는게 고작이었고 신뢰성은 오늘과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. 여기서 구데리안에 의해 전차의 항속거리를 극대화 하기 위해 민간 주유소를 적극 활용하는 한편, [[제리캔]]을 활용하여 달리면서 급유하고 빈캔은 그대로 길가에 던져버리며 후속부대가 캔을 회수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처음 활용된다. 그래서 이후의 독일군 전차들을 보면 대부분 제리캔을 꼽을 수 있는 수납 트레이들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. 당시 전차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고작 수백에서 수천 미터를 굼뜨게 이동하다 서버리는 고철덩어리였다. 구데리안은 수 백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보유한 사단규모 이상의 부대가(비록 낙오차량도 상당 수 존재했지만) 성공적으로 천여 키로미터를 고속으로 기동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반대자들에게 당당하게 입증한 것이다. 이 사건을 계기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. 그토록 노력해 왔던 구데리안의 기동전 이론이 독일군에게 조금씩 수용되어 [[에발트 폰 클라이스트]]와 같은 고위급 장교들 중 일부도 드디어 전차의 잠재력에 대해 눈을 뜨고 기갑 부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. 구데리안은 후일 [[프랑스 침공]]의 승리보다 이때의 작전이 더 어려웠고 힘든 도전이며 감격스러웠다고 회고한다. 그리고 해임된 루츠를 대신에 1938년 2월 4일부터 2개의 기갑사단을 포함한 제16기갑군단의 군단장이 된 구데리안은 다시한번 [[뮌헨 협정|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]] 당시 [[체코슬로바키아]]의 주데텐란트 지방에 신속히 진군하는 데 성공했다.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 진군 작전은 기갑 군단이 연습이 아닌 실제로 장거리를 고속기동을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대열, 정비, 수리, 보급, 통신 등 다양한 실전적 문제들을 실전을 치르기도 전에 경험하고 고민할 수 있게 해주었다. 이때 얻은 노하우는 그대로 [[프랑스 침공]]과 [[바르바로사 작전]]에서 구데리안 휘하 출신의 부대들이 다른 부대들보다 압도적인 속도로 진격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. 그리고 후일 여기에 충격을 받은 [[연합군]]은 이들의 놀라운 진군에 대하여 [[전격전]]이라 이름 붙이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